동아일보 2007-04-23 05:09]    

[동아일보]

《“명색이 교육심리학자지만 딸의 재능에 대해선 저도 도통 감을 못 잡겠어요.” 열아홉 나이에 200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당선한 홍지현(성균관대 약학과 1년) 씨의 아버지 홍성훈(50) 여주대 교수의 말이다. 홍 교수는 공교롭게도 다중지능(MI)이론에 기초한 잠재능력진단검사를 개발한 문용린 서울대 교수의 제자다. 그런 홍 교수가 “지현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다”고 할 정도로 홍 씨는 독특한 다중지능의 소유자다. 홍 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수학천재 페르마의 전기를 읽고 수학에 빠져들어 고졸검정고시에 합격한 16세 때까지 아주대 과학영재교육센터에서 특별수업을 받은 수학영재였다. 중학교 1학년 때 한국수학올림피아드에서 장려상을 받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고득점을 얻은 뒤 지원했던 학과도 서울대 수학과였다. 비록 2차례나 고배를 마시고 약대로 전공을 바꿨지만 그는 전형적인 이과 학생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연극서클에 들어가 연극에 눈을 뜬 지 1년도 안 돼 자신의 창작희곡으로 당당히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남몰래 쓴 3편의 습작 만에 거둔 성과였다. ‘수학은 이과, 언어는 문과’라는 통념이 무너진 순간이다.》

비결은 고도의 집중력이었다. 홍 씨는 연극을 처음 본 뒤 1년간 한 달 평균 12편씩 144편의 연극을 봤다. 희곡도 셰익스피어 희곡 전집과 이강백 희곡 전집을 포함해 100여 편을 읽었다고 했다. 어릴 때 쌓은 수학 공부도 많은 도움을 줬다.

“수학에선 주어진 문제를 못 풀면 하급, 주어진 문제를 잘 풀면 중급, 주어지지 않은 문제까지 풀 때 상급으로 분류할 만큼 상상력을 중시합니다. 연극을 집중적으로 보다 보니 수열의 법칙을 찾듯이 그 속의 규칙성을 발견하게 되고, 내가 극작가라면 저런 상황을 어떻게 풀어 갈까 하는 상상력도 발휘되고….”

신춘문예 심사위원이었던 김태웅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도 수학 공식을 풀 때의 치밀성과 상상력이 극작에 많은 도움을 줬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홍 씨의 작품 ‘변기’는 신의 형상이 변기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혼란을 재치 있게 구성한 작품이다.

“기성 작품에서 발견하기 힘든 전복적 상상력과 치밀한 구성이 도저히 10대의 작품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뛰어났습니다. 수학에 재능이 있었다면 그런 부분이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홍 씨는 철저히 이야기 중심으로 연극을 봤다. 어떤 배우가 가장 좋았느냐, 혹은 어떤 연출가가 좋았느냐는 질문에는 답변하지 못했지만 어떤 장면이나 어떤 대사가 좋았느냐는 질문에는 금방 답을 내놓았다. 희곡을 읽으면 바로 대사로 귀에 들린다고 했다.

그렇게 연극에 몰입하다 보니 학과 공부는 뒷전이었다. 덕분에 학사경고를 받고 4년 전액 장학금까지 날렸다.

집안에선 그런 사정을 전혀 몰랐다. 홍 교수는 지난해 12월 22일 딸에게서 받은 문자메시지를 아직도 보관 중이다. ‘아빠, 신춘문예 연락 왔다. 동아일보.’

“문과생에게도 어려운 신춘문예가 이과생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하고 어안이 벙벙했어요. 통화를 한 뒤 사정을 알았지만 말문이 막혔어요. 그렇게 연극에 빠져 있는 줄도 몰랐고. 그렇지만 딸아이의 재능이 어떻게 펼쳐질지 저도 모르겠는데 어쩌겠어요. 덕분에 ‘화려한 외출 비용’을 물어야 했지만 ‘장하다’고 말하고 말았죠.”

그만큼 홍 씨의 부모에게 딸의 재능은 아직도 미스터리다. 홍 씨는 세 살이 넘을 때까지 ‘으흥’과 ‘따’라는 두 마디밖에 못했다고 한다. 어머니 전수정(48) 씨는 “말문이 트인 뒤에도 한동안 말을 더듬어서 혹시 지능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아동전문가에게 상담까지 받았다”고 털어놨다.

그런 홍 씨가 4세가 되면서 글을 깨치고, 6세에는 동화까지 지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동화구연대회에 ‘우산의 불평’이란 자신의 창작동화를 들고 나갔다가 기성동화를 들고 나온 친구들에게 밀려 상을 받지 못하자 매우 분해했다고 한다. 이미 그때부터 책을 한 번 읽으면 몇 개월간 관련 서적만 독파할 정도로 뛰어난 집중력을 보였다. 그래서 홍 씨의 부모는 딸이 문과 쪽 재능이 있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5학년 때 시키지도 않았는데 중학교 수학교과서까지 사들고 와서 공부를 하더란다. 어머니 전 씨는 그런 딸을 오히려 혼냈다고 한다. 기초학력이 중요한데 자기 실력은 생각하지 않고 너무 앞서 가려는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홍 씨는 스스로 수학영재의 길을 찾아 나섰다. 사이버영재센터로 들어가 제시된 수학 문제를 풀고 여름방학 때 영재캠프에 참가한 것도 그가 스스로 물어물어 찾아간 길이었다. 선행학습에 익숙한 서울 학생들과 달리 학원 한 번 다닌 적 없는 홍 씨가 안쓰러워 학원을 보내 봤지만 3일 만에 스스로 그만뒀다. 홍 씨는 순전히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수학 증명을 펼칠 때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부모는 뒤로 물러나 딸의 행보를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검정고시를 선택했을 때도, 대학 전공을 수학과에서 약학과로 바꿀 때도, 학사경고를 받고 1학년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나섰을 때도 이를 묵묵히 추인해 줬다. 홍 교수의 말이다.

“저도 검정고시 출신입니다만 그때는 집안이 워낙 가난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교육학자인 제가 왜 정규교육 과정의 중요성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지현이의 재능은 제도교육의 틀 안에서 제대로 발현되기 어렵다는 생각에 지현이의 선택을 존중해 준 것입니다.”

홍 교수는 하도 답답해 문용린 교수와 딸의 진로 문제로 상담을 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때 돌아온 말이 ‘왜 신이 두는 장기판에 훈수를 두려 하느냐’는 거였다. 이후 홍 교수는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도 딸의 호출을 받으면 차를 몰고 나가 여주대교를 왔다갔다하며 생각에 잠긴 딸을 묵묵히 지켜보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했다고 말했다.

홍 씨 자신도 자기가 어디로 튈지 확신하지 못한다. 여전히 한 달에 8편씩 연극을 보고 희곡도 여러 편 구상 중이지만 올해부터 약학 공부에도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연극이 왜 좋아졌는지 모르는 것처럼 약학이 왜 갑자기 좋아졌는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저도 제가 어디로 튈지 모르겠어요. 너무 즉흥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인생이 나 좋은 일만 할 수 있게 호락호락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아직은 젊기 때문에 정말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시간적 여유는 있다고 생각해요.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 순간순간에 충실하겠습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홍지현 씨 잠재능력 ‘다중지능’ 분석

언어-수학 “전문가 이상”… 운동-친화는 “노력 필요”

다중지능(MI)이론에 기초한 잠재능력진단검사 결과 홍지현 씨는 8개 지능 중 언어지능과 논리수학지능이 단연 뛰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논리수학지능은 상위 5% 안에 들어 전문가 기준점수보다 7.6점이 높았다. 언어지능은 더욱 탁월해 상위 0.5∼0.7% 안에 드는 것으로 조사됐다. 일반 작가들의 평균에 비해 무려 23.4점이나 높은 점수였다. 이과와 문과적 재능을 겸비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분석 결과다.

반면 신체운동지능과 인간친화지능, 자기성찰지능은 평균보다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 홍 씨의 100m달리기 기록은 20초대에 불과했다. 인간친화지능이 낮은 것은 고등학교 과정을 뛰어넘은 채 대학에 들어간 것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홍 씨는 올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들의 작품 공연 마지막 날인 18일 오전 4시까지 이어진 ‘쫑파티’ 자리를 지키는 사교성을 보였고, 노래방에서는 신세대답지 않게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찰랑찰랑’과 같은 트로트 노래 솜씨를 뽐냈다. 홍 씨는 “아직까지 남자친구 하나 없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는 깜찍한 자기분석을 내놓았다.

문용린 서울대 교수는 “홍 씨는 상반된 다중지능이 발달했다는 점에서 매우 이상적 케이스로 언어나 논리수학 분야가 아닌 다양한 분야에서 빛을 볼 수 있다”며 “다만 자기성찰지능이 부족한 것으로 조사된 만큼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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